눈을 떴을 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방에 홀로 앉아있으니 공허함이 몰려왔다. 그리고, 그 틈새를 불안감과 긴장감이 메꿔내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목가로 손을 가져갔다. 잠들기 전에 신이치가 발라주었던 연고가 손끝에서 묻어났다.
소파에서 일어나 신이치가 앉아있던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로 서류들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평소라면 시선도 안 줄 서류 중에서 묘하게 시선이 가는 서류가 하나 있었다. 그것을 집어 들려는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님께서 부르십니다."
집어 들려던 서류를 마저 내려놓았다. 그래,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었지. 문득 이곳에 없는 신이치가 떠올랐다.
"…신이치는? 신이치도 불려갔어?"
"네"
머리가 새하얗게 비었다. 머뭇거릴 틈이 없었다. 서류 더미에서 시선을 떼고는 문을 나섰다. 조금이라도 늦지 않았기를 속으로 기도하며 빠른 걸음으로 건물의 최상층으로 향하기 위해 승강기에 올라탔다. 손끝이 떨려왔다. 곧이어 최상층에서 승강기가 멈추고 문이 열리는 그 짧은 시간조차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초조해졌다.
"늦었잖아. 카이토"
"… 미친 새끼야!"
문이 열리고 보이는 광경에, 나는 눈이 뒤집히는 걸 느끼며 달려들었다.
모리 코고로는 아침에 전달받은 연락에 단숨에 이곳까지 달려왔다. 자신이 도착한 곳은 코이즈미 아카코의 저택이었다. 그녀는 홀연히 나타나 최고의 미녀라고 칭송을 받기 시작했지만, 정작 그녀에 대한 정보는 베일 속에 감춰져 있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에게 저택의 위치를 알려주며, '만나고 싶다'라고 연락을 취해오다니 코고로는 처음에 꿈인 줄 알고 멍하니 시간을 허비하다 부랴부랴 준비를 마치고는 이곳까지 왔다. 코고로가 저택 앞에서 헛기침하니 시중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을 건네며 안으로 안내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중인의 말에 코고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내를 받아 응접실 앞에 도착했다. 붉은빛의 중후한 문에 압도당해 말문이 막힌 코고로를 힐끔 쳐다본 시중인이 문을 열어주자,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응접실로 들어서며 말했다.
"아카코씨,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는데요."
"아쉽게 되었군요. 아카코가 아니라서요."
그곳에는 얼핏 봐도 고급스러움이 묻어나는 새하얀 정장을 입은 사내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아카코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코고로는 갑작스러운 남자의 등장에 당황해 머뭇거렸다. 그런 그를 예상했다는 듯 사내는 당황한 모리 코고로를 보며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인 것 같네요."
"…오랜만이라니, 사람 잘 못 보신 것 같습니다만."
코고로는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제가 아는 한 단연 눈에 띌 정도로 화려한 외모를 가진 남자는 기억에 없었다.
"그럴 리가."
남자는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나더니 코고로의 앞에 마주 섰다. 사내와 눈이 마주치자 코고로는 기시감을 느꼈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붉은 적안. 이 눈동자를 마주한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코고로는 그제야 떠올려냈다.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 머리칼, 그리고 붉은 눈동자.
"네놈은…."
"이제 기억나시나요?"
"그 금발에 적안…."
"다행이군요. 기억 못 하시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거든요."
"하쿠바 사구루, 네가 어떻게…."
"살아있냐고요?"
사구루의 눈이 보기 좋게 반달로 휘며 눈웃음을 보였다. 그를 처음 본 사람이라면 눈웃음이 매력적이라고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코고로는 그 눈웃음이 매력적이라 느끼면서도 마냥 편하지 않았다. 코고로는 사구루의 눈과 마주한 순간 깨달았다. 서늘하게 반짝이는 적안, 그 눈동자 속에는 독사가 숨어있었다. 그것은 부탁하는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부탁을 가장한 명령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코고로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모른 척 입을 열었다.
"네가 살아있을 줄은 몰랐다."
"그렇겠죠. 살아있기를 바라지 않았을 테니까. 아닌가요?"
"……."
사구루의 말에 코고로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꿈틀거렸지만,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까지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정보를 사고파는 '모리'인 자신조차 몰랐다. 그것은 그 누구도 '하쿠바 사구루'라는 사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의미와 같았다. 그렇게 치밀하게 자신의 흔적을 지웠던 남자가, 제 앞에서 그 무엇도 숨기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 코고로는 제 머릿속에서 추측한 정보와 사구루의 행동에서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코고로는 제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죽일 생각으로 부른 거냐."
"아, 사실 숨길 생각도 없었지만. 반쯤은 맞추셨네요."
"뭐?"
"구구절절 길게 늘어놓는 취미는 없으니, 본론만 말하죠. 나는 당신에게 기회를 드릴까 합니다."
"어째서……"
"…제 친우들을 돌봐주셨던, 그 빚을 대신 갚는다고 치죠."
코고로는 사구루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다고 느꼈다. 사구루의 말에 코고로의 머릿속이 재빠르게 돌아갔다.
"기회라 함은?"
"나를 위해 '모리'로 일하세요."
"…별 소리를 다 하네. 내가 그런 능력이나 있을 것 같아?"
"'모리'인 당신이라면 충분할 텐데요?"
"이제 와서 내가 필요할 것 같지 않은데, 무슨 속셈인 거지?"
코고로의 말에 사구루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순간 코고로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사구루가 내뱉은 말은 결코 웃어 넘길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구루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오만해 보일 정도로. 모든 것이 제가 원하는 데로 돌아가고 있다고 여기는 태도였다. 사구루의 태도와 갑자기 많아지는 생각에 코고로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 코고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구루는 테이블에 준비해둔 빈 와인잔에 와인을 따랐다.
"시간은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다만…"
사구루는 와인잔을 코고로에게 건넸다. 코고로는 제 앞에 들이민 잔을 내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제가 들을만한 답변이었으면 좋겠군요."
사구루는 창가로 보이는 코고로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소파에 앉으며 그가 거절한 와인잔으로 제 입을 축였다.
"정말 저 남자가 도움이 된다고?"
와인은 쌉싸름함을 느끼던 사구루의 뒤에서 나타난 이는 그의 손에서 와인잔을 빼앗아 들며 말했다. 인기척 없이 자유로이 이 저택을 드나들 수 있는 이는 한 명 뿐이었다. 그는 돌아보지 않은 채로 이 저택의 주인인 그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아카코. 금방 왔네요."
검은 셔츠에 붉은색 슈트를 걸친 그녀는 와인잔 속의 와인을 살짝 흔들더니, 맞은편 소파에 다리를 꼬며 앉았다. 바지 밑단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발목을 따라 아찔한 높이의 적색 스틸레토힐이 잠시 눈길을 끌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적색은 그녀에게 잘 어울렸다. 그녀 만의 색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그녀와 같이 특정 색이 잘 어울리는 이가 있었다. … 흰색이야말로, 그의 색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짧은 회상에서 깨어난 것은 그녀 덕분이었다.
"날 일부로 내보낸 걸, 내가 모를까?"
"그와는 독대하고 싶었거든요."
"변명하는 남자는 인기 없어."
"하하, 제가요?"
사구루는 오만해 보일 정도로 당당한 태도를 보였다. 그 태도에 오히려 웃음이 터진 것은 아카코였다.
"뭐, 그런 단점 정도는 커버 가능할 정도로 매력 있는 남자였지. 당신."
"알았으면, 그 잔이나 돌려줘요."
"내가 왜? 여기 있는 모든 것들, 다 내꺼야."
그녀의 말에 사구루는 다른 와인잔에 와인을 따르며 말했다.
"빚으로 달아둬요. 그 이상으로 갚아드릴 테니."
"대단한 자신감이야. 뭐, 그래서 마음에 든거지만."
사구루는 제게 향하는 시선에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아카코를 향해 말했다.
"'모리 코고로'라는 남자는 쓸데없지만, '모리'인 그는 쓸만하거든요. 그는 고민하다 결국 제 발로 걸어올 겁니다."
"자신만만하네?"
"그는 보기보다, 정에 약한 편이거든요."
"그래 보이진 않던데?"
"뭐, …9년 전 사건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겁니다. 제 딸을 볼 때마다."
"모리 란이라고 했었지? 믿는 구석이 있었네."
아카코의 무표정하던 얼굴에서 드디어 변화가 생겼다. 그녀의 얼굴에서 지독하리만큼 화려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 화려함 속에 감춰진 잔혹함을 사구루는 알고 있었기에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먹이사슬의 최상위 포식자였으니까.
"건배라도 할까?"
아카코는 제 앞의 사내에게 와인잔을 흔들며 말했다. 그 말에 사구루는 이제는 닳고 닳아 흐릿해진 기억을 더듬었다. 제 기억 속의 그를 떠올리며 아카코의 잔에 제 잔을 겹치며 말했다.
"진혼곡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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