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입술을 뒤덮었다. 부드러운 입술을 가볍게 물고 입안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코끝으로 장미 향이 느껴짐과 동시에 말캉하게 느껴지는 혀와 닿자 등 뒤로 아찔한 전율이 흘렀다. 그저 닿았을 뿐인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더 닿고 싶었다. 그 하얀 살결을 매만지고 은밀한 곳을 헤집고 싶었다. 더 가까이, 더 깊숙이, 움직이려는 순간.
“아….”
잠에서 깼다. 자연스럽게 이불을 들춰보자 앞섬이 뜨거운 열기와 함께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몽정이라니, 그럴 여유가 있었나? 텐쇼인은 한숨과 함께 상체를 일으켜 파티션 너머로 보이는 사쿠마의 침대로 힐끔 시선을 돌렸다. 당황스러웠다. 텐쇼인 자신이 몽정했다는 것보다, 몽정의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사쿠마 레이라는 사실이. 그래서인지 더욱 사쿠마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꿈속에서의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부드러움이, 아찔하게 느껴졌던 그 순간이. 잠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조용히 이불을 밀어냈다. 어둠이 짙었지만 텐쇼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사쿠마의 침대 앞에 섰다. 낮에 자고, 밤에는 깨어있던 그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기억을 얼핏 들춰보니 활동 때문에 밤낮을 바꿔야 하는 것이 힘들다고 중얼거리던 것이 떠올랐다. 텐쇼인은 묘한 흥분감을 안고 사쿠마의 침대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터앉았다. 창백해 보이는 얼굴, 감은 눈동자. 그 아래에 숨겨진 매혹적인 홍차색의 눈동자. 자신이 우러러보기만 했던 이가 자신으로 인해 날개를 잃고 추락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이제는 자신과 같은 위치에 서 있는 그가 우스워, 텐쇼인은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참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쿠마 레이를 추락시켰다는 사실에 쾌감이 더해졌다. 텐쇼인은 조용히 축축이 젖은 제 성기를 쥐었다. 방안으로 뜨거운 열기가 퍼졌지만, 그 누구도 일어나지 않았다.
푸른 하늘이 주황빛으로 천천히 물들어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어둠이 슬금슬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해가 모습을 감추고 달이 완전히 모습을 떠오를 때쯤, 드디어 쌓여있던 서류들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자 텐쇼인은 굳어있던 몸을 가볍게 스트레칭하고는 미간을 문질렀다. 아, 쉬고 싶다.
“그렇게 쉬고 싶으면, 그만하는 게 어떤고.”
“아,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뱉었나 보네.”
“…의식하지 못할 정도라면, 쉬는 게 좋겠구먼”
“별일이네, 사쿠마 군은 나한테 관심 없잖아. 아, 관심이라고 표현하기 그런가? 나를 싫어하니까.”
사쿠마는 텐쇼인을 빤히 쳐다보다가, 침대에서 일어나 그가 앉아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텐쇼인은 사쿠마가 제게 다가오자 흐트러져 있던 서류들을 정리하며 한 손으로 턱을 괸 채로 입을 열었다.
“도와주려고?”
“애초에 도움을 받을 생각도 없지 않누.”
“…사쿠마 군이 별일이네.”
“하지만, 자네가 도움을 바란다면 못 할 것도 없지.”
아무렇지 않게 태연하게 말하는 사쿠마의 행동에 텐쇼인이 도리어 말문이 막혔지만 내색하지 않으며 똑바로 그의 눈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그런 사이는 아니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사쿠마는 대답 대신 책상에 살짝 걸터앉은 채로 텐쇼인의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텐쇼인은 머리카락에서 느껴지는 손길을 피하지 않고 사쿠마의 의중을 확인하려 했지만, 그는 그저 웃으며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텐쇼인이 입을 열기 전에 사쿠마가 한 발 더 빨랐다.
“그랬었지. 텐쇼인 군, 자네는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누?”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그건 본인보다 텐쇼인 군이 더 잘 알지 않누?”
“…….”
“밤마다 본인의 침대에 걸터앉아…”
아, 들켰다.
“알고 있었어?”
“그렇게 뜨겁게 바라보는데,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할 것 같네만.”
사쿠마는 말없이 텐쇼인을 보며 웃었다.
“그리고 마침 기숙사에는 본인과 텐쇼인 군, 단 둘 뿐인데…”
텐쇼인은 지금 벌어진 상황이 정말 현실인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눈만 깜빡이는 텐쇼인을 보며, 사쿠마는 무대 위에서 보여주던 눈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직접 본인을 마주하는 게 어떤고.”
사쿠마의 말이 제 뇌리에 박히고,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텐쇼인은 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사쿠마의 말에서 텐쇼인이 승낙할 것임을 알고 있다는 자신감이 베여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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