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2로 이어집니다.
미도리야는 사무실에 출근해 코스튬으로 갈아입고 탈의실에서 나와 제 자리에 앉았다. 평소와 같은 아침, 평소와 같은 출근, 그리고 평소와 같이 제가 고용한 사이드 킥이 건네 오는 파일을 받아 하루를 시작했다. 파일을 열고 서류들을 훑었다. 이건… 놀랍게도 전부 다 같은 약물에 대한 내용이었다.
[불법 약물 ‘X’].
어느 누가 만들어서 유통하고 있는지는 알려진 내용 없음.
액체 형태로 체내에 주입 시, 의식 불명 상태로 빠지게 됨.
날카로운 편에 속하는 미도리야의 촉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서류의 마지막 장까지 모두 확인한 미도리야는 파일을 덮으며 목덜미를 주물렀다. 파일을 전부 읽었지만, 끝까지 치료법과 완치되었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찌푸려지는 미간을 손으로 문지르며 물었다.
“’X’라는 불법 약물, 치료할 수 없는가요?”
“네. 아직은 치료법이 없는 상태라고 들었어요.”
치료법도 없는 상황에, 활개를 치는 불법 약물. 심각한 상황에 말문이 막혔다. 사무실 안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띠링. 순간 익숙한 알림음이 울렸다. 사이드 킥이 품속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고 미도리야를 쳐다보며 말했다.
“데쿠, 지원 요청이 들어왔어요.”
사이드 킥의 말에 미도리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어느 구역이에요?”
“C구역이에요.”
그 순간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에 애써 마른침을 삼켰다. C구역은 바쿠고가 관리하는 지역이었다. 아마도… 캇쨩과 마주치겠지. 한숨을 내쉬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며 사무실을 나섰다.
바쿠고와의 사이는…. 유에이를 졸업하고 바로 동거까지 할 정도로 가까워졌지만,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하고 막을 내리게 되었다. 올마이트의 자살. 그의 죽음 이후, 바쿠고와 마주치는 것이 싫어 일부러 피하고 있었다. 오늘과 같은 상황은 어쩔 수 없지만, 최대한 부딪히지 않기를 기도하며 C 구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원 왔습니다! 상황이 어떻죠?”
“데쿠!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건물이 무너져서 인명 피해가 심해요. 폭심지는 빌런 제압 중이라 인명 구조 부탁드립니다.”
C 구역에 도착하자 익숙하게 바쿠고의 사이드 킥에게 상황을 전달받은 미도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서 빌런을 제압하는 바쿠고를 확인하고는 무너진 건물로 다가가 잔해들을 치우고 부상자들을 살피고 응급 대원에게 인계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인명 구조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가자, 미도리야는 숨을 돌리고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하, 데쿠를?”
익숙한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힐끔 고개를 돌리자 바쿠고가 아까 자신에게 상황을 알려주던 사이드 킥과 말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다고 쳐. 그럼 내가 아까 챙기라던 건 어쨌는데!”
“죄송합니다. 그게…”
자리를 피하려고 했으나, 바쿠고의 말에 급하게 주위를 살피며 당황하는 사이드 킥의 반응에 호기심이 일었다. 조용히 사라지려 했던 움직임을 멈추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거 중요한, 약물이라고 했잖아!”
약물? 순간 아까 서류에서 봤던 불법 약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불법 약물을 입수했던 건가? 순간 바쿠고가 몸을 홱 돌리자 뜻하지 않게 눈이 마주쳤다. 대화에 정신이 팔려 조용히 사라질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씨발.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낮게 욕을 읊조리며 얼굴이 구기는 바쿠고의 행동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주변에 보는 눈이 많았다. 치밀어 오르는 화를 애써 참아내고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인명 구조도 정리된 것 같으니까 난 이만 갈게.”
대답은 필요 없었다. 불법 약물에 관한 내용이 걸렸지만, 돌아가서 알아봐도 충분했다. 순간적으로 솟아오르는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며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손목을 타고 악력이 느껴져 표정을 찡그렸다.
“뭐야?”
바쿠고는 대답 대신 미도리야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얼떨결에 손목을 잡힌 채로 바쿠고를 따라 이동하다 인적이 드문 곳에 도착하자 바쿠고가 걸음을 멈췄다.
“사람들 눈을 피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야?”
바쿠고가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옴싹거리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입을 일자로 꾹 다무는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할 말 없으면 난 갈 거야.”
잡혀 있던 손목을 툭 하고 힘을 주어 풀어냈다. 짧은 침묵 끝에 바쿠고가 입을 다시 열었다.
“야…, 히어로를 믿냐?”
“그게 무슨 소리야?”
“히어로 연합을 믿냐고.”
현직 히어로에게 히어로 연합을 믿냐는 말을 하다니. 당황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미도리야의 표정을 본 바쿠고는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덤덤하게 팔짱을 낀 채로 그저 쳐다볼 뿐이었다. 미도리야에게서 답을 듣고 그에 따른 대답을 하겠다는 것처럼.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는데, 너나 나나 히어로야. 그런 질문은…”
“…히어로 연합이 빌런 연합과 관계된 거 같다. 불법 약물 쪽도 그렇고.”
“뭐…?”
미도리야는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반문하자 바쿠고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올마이트가 그런 선택을 한, …”
아. 바쿠고의 입에서 제 스승의 이름이 거론되자 미도리야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올마이트를, 그를 거론해서는 안 됐다. 다른 누구도 아닌 너만은.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올마이트를 거론하다니, 제정신이야?”
난 캇쨩을 보면 그날이 아직도 생각나. 싸늘한 말투에 바쿠고가 잠시 망설이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곧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바쿠고가 동요하고 있음을 대변했다. 그 행동에 움켜쥔 주먹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지어? 하. 짧게 숨을 내뱉은 미도리야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나이트아이의 예지대로 올마이트는 점차 극도로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쇠약해진 육체는 지극히 수척해졌고,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온갖 잔병에 시달리면서 토혈까지 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자의에 의해 죽음을 택할 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눈을 가리고 애써 외면하며, 일부러 핑계를 대면서 찾아가지 않았던 것은 그의 유일한 계승자였던 자신이었다. 다만….
“다른 누구도 아닌 캇쨩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어?”
약을 삼키는 선택은 그였으나 그의 선택을 말리지 않고 약을 건네준 것이 바쿠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낀 실망과 배신감은 지금까지 이뤄왔던 우리의 관계를 한순간에 무너트리기에 충분했다.
“……”
바쿠고의 어깨의 떨림이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평소와 같이 얼굴이 일그러지고 차갑게 말을 내뱉을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바쿠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정적 속에서 바쿠고가 손가락으로 팔짱 낀 팔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만 흘렀다. 폭풍전야의 긴장된 공기가 감돌았다.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멈췄다.
“그래. 난 자격이 없지.”
화려한 불꽃을 닮은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손끝이 미약하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 상처 입혀버렸다. 그것을 깨닫기도 전에 바쿠고가 몸을 돌리는 순간 저 멀리서 바쿠고의 사이드 킥이 달려오며 소리쳤다.
"폭심지! 데쿠! 근방 빌런들이 전부 C구역으로 몰려들고 있어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사이드 킥의 말에 다시 돌아간 현장은 우리가 자리를 비운 짧은 순간, 빌런들이 무더기로 튀어나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많은 이들이 상처를 입었고, 비명을 내질렀다. 처참한 광경에 정신을 차리자 바쿠고가 빌런들에게로 달려들고 있었다. 인명 구조도 중요했지만, 지금은 빌런 제압이 우선이었다.
먼저 바쿠고가 미처 제압하지 못한 빌런들을 쓰러트리기 시작했다. 전투에 적합한 자신과 바쿠고의 조합은 빌런 제압에 최적이었기에 그리 어렵지 않게 빌런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상황이 정리되자, 인명 구조를 위해 사이드 킥에서 소리쳤다.
“부상자들을 인계해주세요!”
그 순간 애처롭게 들려오는 소년의 목소리가 미도리야의 귓가에 닿았다. 한눈에 봐도 중상을 입은 소년이 배를 부여잡은 채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빌런의 개성에 의해 꿰뚫린 상처에서 붉은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급하게 지혈을 했지만, 상태가 위급했다. 미도리야가 소년을 안아 들려는 순간, 기절한 척 기회를 엿보고 있던 빌런이 미도리야에게 달려들었다. 품속에 숨기고 있던 주사기를 꺼내 들었다.
날이 선 촉이 경고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등 뒤로 식은땀이 맺혔다. 자신의 품에는 피범벅이 된 소년이 있었다. 급하게 지혈하기는 했지만, 섣부르게 움직여 상처가 벌어지게 되면 소년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선택해야만 했다. 자신은 히어로였다. 사람을 지키는 히어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빌런의 모습에 미도리야는 자신의 몸으로 소년을 감싸며 눈을 질끈 감았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의아함에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머릿속이 하얗게 번졌다.
눈 앞에 캇쨩이 서 있었다.
“…캇쨩?”
미도리야의 부름에 바쿠고가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자 바쿠고의 언뜻 보이는 목덜미가 시야에 들어왔다. 바쿠고의 목덜미에는 주사기가 꽂혀 있었다. 눈앞이 새하얘지며 헉하고 숨을 삼켰다.
“멍청하게 긴,장 풀지 말라고…”
말을 끝낸 바쿠고가 제 목에 주사기를 꽂은 빌런을 날려버리고, 손을 들어 제 목에 꽂힌 주사기를 빼냈지만 이미 주사기의 반 이상이 사라진 뒤였다. 바쿠고가 멍하니 제 손의 주사기를 내려다보다 비틀거렸다. 자신도, 바쿠고도 그 액체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불법 약물이었다.
바쿠고의 몸이 허물어지듯 쓰러지는 광경에 미도리야는 손을 뻗었다. 뻗은 손 사이로 모든 걸 포기한 것처럼 바스러지는 웃음을 지으며 쓰러지는 바쿠고의 얼굴이 보였다.
“캇쨩!!”
쓰러지는 바쿠고를 제품에 안아듬과 동시에, 바쿠고의 눈에 천천히 감겼다.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 기억이 없었다. 뒤늦게 도착한 경찰과 구급대원에게 상처를 입은 소년을 인계했지만, 차마 바쿠고만큼은 넘길 수 없었다. 제 손으로 직접 옮기겠다고 거절하며 구급대원들을 물렸다. 숨이 멎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못하고 그저 바쿠고만 멍하니 내려다보기만 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손을 들어 바쿠고의 얼굴에 손을 가져가려 했다.
“아…, 손이 너무 더럽다.”
미도리야는 피와 먼지들이 뒤범벅된 제 손을 거칠게 바지에 문지르며 닦아냈다. 여러 번 닦아내며 옷에 쓸려 붉어진 손을 바쿠고의 얼굴로 가져갔다. 미간을 찌푸리지 않고 눈을 감은 바쿠고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하게만 보여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마에 자연스럽게 드리워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짝 쓸어보다 뺨에 손을 대보았다.
따뜻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었다. 바쿠고의 뺨을 매만지던 손이 덜덜 떨렸다. 미처 닦이지 않은 피가 바쿠고의 얼굴에 묻어나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미도리야는 겨울 울음을 참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 가자. 캇쨩.”
미도리야는 바쿠고를 안고 일어섰다. 품속의 바쿠고의 몸이 차게 느껴져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정신을 차리자 집 앞이었다. 바쿠고를 안아 들고 무작정 걸어온 기억만 있었다. 이곳은 우리가 동거했던 집이었다. 이제는 바쿠고 혼자만 사는. 문을 부수고 들어가야 하나…. 짧은 순간 고민을 하던 미도리야는 결국 제가 아는 비밀번호를 눌렀다. 띠리릭. 맑은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느낌에 집안으로 간신히 발을 내디뎠다. 내딛는 발걸음이 무겁게만 느껴져 자꾸만 밑으로 푹푹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입술을 깨물며 바쿠고를 안은 손에 힘을 주며 욕실에 들어섰다. 먼지가 가득한 바쿠고의 몸을 정성스럽게 씻어내고, 방으로 이동해 몸에 난 상처들을 치료한 후 침대 위에 조심스레 뉘이고 그 옆에 살짝 걸터앉은 채로 고개를 떨구었다.
“캇쨩….”
내가 어떻게 해야 해? 난 모르겠어…. 분명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 말을 들어줄 이는 이제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않으면 어쩌지? 미도리야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지끈거리는 미간을 손으로 꾹 누르다 침대 위로 가지런히 놓인 바쿠고의 오른손을 움켜쥐어 제 얼굴에 가져다 댔다.
미약하지만 느껴지는 맥박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넘겼다. 방법을 찾아야해. 분명, 캇쨩은 무언가 알고 있었다. 히어로와 빌런 연합, …그리고 불법 약물. 나 정말 도움이 안되는 구나. 올마이트의 이름에 흥분해 제대로 듣지 않았던 자신을 향해 욕을 읊조리며 일어섰다.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못할 내용이라면, 이 방에 단서가 있을터였다.
고개를 돌려 익숙하면서도 낯선 바쿠고의 방을 둘러보다 미도리야는 홀린 듯이 책상으로 다가갔다. 바쿠고의 성격을 대변하듯 반듯하게 정리 정돈된 책상 위로 올마이트가 새겨진 컵이 놓여있었다.
이건…, 동거를 위해 같이 장을 보러 나갔을 때 샀던 컵이었다. 올마이트 굿즈를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들떠 장바구니에 이것저것 집어넣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야, 내려놔. 꼴사납게. 핀잔을 주던 바쿠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결국 올마이트 굿즈를 포기하는 대가로 이 컵을 사는 것으로 바쿠고와 타협했었다. 컵을 애지중지하는 나를 보고 기가 막힌 듯 혀를 찼던 바쿠고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입술 사이를 통해 새어 나왔다. 그러다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제야 주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숨이 턱 막히고 입가가 떨려왔다. 방에서 나와 거실로, 그리고 내가 쓰던 방으로 들어섰다. 집 안의 모든 것들이 내가 도망치듯이 떠났던 그 날로부터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집안 곳곳에 내가 쓰던 물건들이 그 당시 그대로 정리되어 있었다. 분명히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을 텐데, 반질반질한 광택을 머금고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쓸었지만 먼지 한 톨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내가 떠난 이후에도, 바쿠고가 꾸준히 내 방을 청소해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저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미도리야는 자신의 방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다시 바쿠고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우리의 관계는 그 전만도 못하다고, 깨져버렸다고 믿었었다.
내가 그랬듯이, 바쿠고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 하하”
한숨을 쉬고 다시 바쿠고의 책상으로 다시 다가가 컵을 집어 들었다. 캇쨩, 너는…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홀로 남은 이 집에서 무슨 생각을 했어? 눈을 감은 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만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컵을 다시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채로 몸을 돌려 바쿠고에게 다시 돌아가려던 찰나, 책상 아래에 놓인 휴지통이 눈에 들어왔다. 깔끔하게 비워진 휴지통 속에는 두꺼워 보이는 서류 봉투가 홀로 덩그러니 버려져 있었다. 홀린 듯이 몸을 숙여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 위로 쓰인 정갈한 글씨체가 눈에 띄었다.
[ 데쿠 ]
잡으려던 손을 멈췄다. ‘데쿠’ 라고 쓰인 봉투 위의 글씨 위로 몇 번이고 선을 그었던 흔적이 있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덜덜 떨어가며 집어 들고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깔끔하게 핵심들이 정리된 서류들을 책상 위로 꺼내고, 봉투는 차마 버리지 못하고 책상 한구석에 밀어 두었다. 서류 한 구석에는 바쿠고가 고민했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서류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헛웃음이 나왔다. 히어로와 빌런은 흑과 백이었다. 손바닥 뒤집듯이 제 잇속을 위해 빌런들의 손을 잡아 왔던 것은 물론, 빌런들의 행태를 눈감아주고 형량까지 줄여 주기까지. 그래, 그들은 공생 관계였다. 빌런과의 공생을 택한 히어로들을 확인하고, 그들이 회유하려던 히어로들의 리스트까지 눈으로 훑었다. 그리고 익숙한 이름에 숨이 막혔다. 제가 아는 세계가 부서져 내렸다. 자신이 알던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있었다. 서류는 어느새 마지막 장에 다다르고 있었다.
히어로 협회에서 어떤 이유에서 인지 빌런 연합과 협약하고 불법 약물인 ‘X’를 만들었다. 개발을 위한 자본과 약물을 실험하기 위한 실험체까지 빌런 쪽에 제공했다는 구체적인 증거까지 서류에 첨부되어 있었다. 아마도 불법 약물을 통제권을 가져가 저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황은 최악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히어로 연합들의 계획과 다르게 치료제의 부재로 인해 그들은 불법 약물을 통제할 수 없었다. 빌런 연합은 애초에 치료제를 만들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멍청하게도 히어로 협회는 빌런 연합에게 당했다.
손에 힘이 들어가자 종이가 처참하게 구겨졌다. 미도리야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분명 짧지 않을 시간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종이 끝이 살짝 바래질 정도의 시간을 혼자 고민해왔던 거야…. 종이를 살짝 쥔 손이 떨렸다. 바쿠고는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알맞은 표현이었다. 남에게 말할 바에는 혼자 끙끙 앓을 사람. 제가 아는 바쿠고 카츠키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캇쨩이 내게 먼저 말을 건네기까지 많이 고민을 했겠지. 그런데, 그런 노력을 내가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서류를 천천히 책상 위에 내려놓고 침대로 걸어갔다.
“캇쨩….”
나는 캇쨩의 마음을 전부 알지 못했다. 아니 앞으로도 알 수 없겠지. 눈물로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바쿠고의 얼굴이 흐려졌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손이 덜덜 떨려와 억지로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찢을 듯이 파고들면서 싸한 고통이 밀려왔다.
무릎을 꿇은 채로 바쿠고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혼자 두어서. 홀로 짐을 지게 내버려 두어서…, 널 상처 주는 말을 해서 미안해. 두 눈 가득히 고여 있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눈물이 손등과 침대 시트 위에 얼룩을 남겼다.
“미안해…, 캇, 쨩…”
난 울 자격도 없는데. 울음을 애써 삼켜내며 소매로 눈가를 닦았지만, 터진 눈물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감은 채로 새하얀 시트 위로 죽은 듯이 미동조차 없는 캇쨩을 내려다보았다. 떨리던 어깨. 허탈하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던 적안.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멍청하게 알아채지 못했고 바쿠고를 밀어내기에만 바빴던 저 자신이 혐오스럽게만 느껴졌다. 미도리야의 눈동자 속에서 세찬 파문이 일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다녀올게. 캇쨩.”
바쿠고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 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고는 뒤돌아섰다. 어, 다녀와라. 들릴 리 없는 바쿠고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조용히 방문을 닫은 채로 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채로 눈을 감은 채로 두 손을 들어내 뺨을 내리쳤다. 정신 차리자.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결심을 해야 했다.
어리석게도. 이들은 자신이 이곳에 왔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기척을 최대한 줄이고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다 알아버렸어요. 다 끝났다고!”
“조용히!”
“조용히 하게 생겼습니까?! 모든 게 틀어졌어요! 불법 약물은 점점 퍼지고 있는데 치료제는 없지, 심지어 이 상황에 폭심지가 모든 것을 알아챘다고요!”
“그래서 C구역으로 빌런들을 보낸 거잖나. 폭심지가 오늘 불법 약물에 당했다고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누구에게 알렸는지만 확인된다면…”
“확인되면, 어쩌시려고요?”
“누구냐!!”
이곳에 자리하지 않았던 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히어로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폭심지라는 단어만 아니었다면, 그저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대화를 엿듣기만 할 예정이었다. 그 단어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 저도 모르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또각거리는 구두굽 소리와 함께 미도리야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에 있던 코스튬 대신 검정색 상복을 차려 입고 나타난 모습에 히어로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데쿠!? 데쿠가 여기엔 어떻게…!”
“자네가 어디까지 들었을지 모르겠지만, 이건 오해야.”
“오해? 어떤 오해요?
어깨를 가볍게 풀며 태연하게 말하는 미도리야의 행동에 히어로들의 얼굴에 긴장이 감돌았다.
“히어로가 빌런이랑 손잡고 불법 약물을 만들었다는 사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히어로들이 자신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그런 히어로들의 반응에 그 모든 것들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미도리야의 얼굴이 차게 식었다.
“어쩔 수 없었네….”
히어로들 사이에서 장관이 걸어 나왔다. 하, 히어로부터 장관까지 엮였었다니. 적막이 내려앉은 공간 속에서 미도리야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
“세상은 아직 히어로를 필요로 하고, 히어로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빌런이 존재해야 가능하지. 절대 ‘선’과 ‘악’이라는 건 이제 존재하지 않아. 그래서 우리는 그들과 공생을 택했네. 그렇다고 그들을 언제나 눈 감아 주는 것은 아니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을 정도로 간섭한다네. 이제 시대는 변했네, 데쿠. 자네도 시대를 따라야지.”
“시대가 변했다고….”
장관의 말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이런 건, 제가 동경하던 히어로가 아니었다. 미도리야는 건물의 벽면에 손바닥을 대자 콘크리트의 서늘함이 손을 타고 느껴졌다. 믿고 싶지 않았던 진실에 닿자 모든 것이 허탈했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오면서 회유하려던 히어로들의 리스트에서 보았던 이름을 억지로 꺼냈다.
“이 모든 사실을… 올,마이트도 알고 있었나요?”
“그가 동의한다면, 더 많은 히어로들이 합류했겠지. 아쉽게도 회유하고 싶었지만 죽는 그 날까지 끝까지 침묵했네.”
계속 의아해하던 의문이 풀렸다. 제 스승은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다. 비록 부상으로 인해 약해졌다 한들, 결코 쉽게 꺾일 사람이, 자살을 택할 사람이 아니었다. 정신력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운 것은 다름 아닌 당신들이었구나. 캇쨩은 그런 올마이트의 극단적인 선택조차도 존중했던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 하하”
폭풍전야나 다름없는 분위기 속에서 미도리야가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로 미친 듯이 웃기 시작하는 데도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 때문에 그 누구도 그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했다.
억지로 지탱하고 있던 이성이 단숨에 무너져 내렸다. 모든 것을 내려놓자, 머릿속이 한결 가벼워졌다.
미도리야는 제 손에서 파지 직하며 스파크가 튀어 오르자, 방금까지 제가 훑던 벽을 강하게 후려쳤다. 콰앙! 굉음과 함께 건물이 거세게 흔들리다 이내 버티지 못하고 붕괴하듯 무너져 내렸다. 건물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면서 잔해와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처참하게 무너진 건물 잔해 더미들 속에서 비명이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아아악!"
"데쿠!"
“살려줘! 당신은 히어로잖아!”
“데쿠! 제발!”
그들의 뻔뻔함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고 헛웃음이 나왔다. 제 앞에서 살려 달라며 울부짖는 히어로에게 다가가 몸을 굽히고 내려보며 말했다.
“히어로?”
“데, 쿠…!”
“그러는 당신들도 히어로였는데….”
히어로는 미도리야와 시선이 마주쳤다. 녹색 눈동자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한 히어로는 겁에 질려 입을 틀어막았다.
“이런게 히어로라면….”
그들은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벌벌 떨고 있는 히어로를 무시하고 미도리야는 그의 목을 향해 손을 천천히 뻗었다. 곧이어 손이 히어로의 목에 닿자마자 잡아챘다. 히어로가 비명을 내지르며 손을 뿌리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지만, 손을 뿌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무표정한 상태로 손에 점점 힘을 주기 시작하는 미도리야의 행동에, 히어로의 얼굴이 종잇장같이 새하얗게 질렸다.
“제발, 제발 살려줘…”
그런 히어로를 싸늘하게 바라보던 미도리야가 손에 힘을 주던 행동을 멈추며 쓰게 웃었다.
“그러기엔 너무 늦었어.”
우드득- 하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한순간에 히어로의 목이 기이하게 꺾이더니, 몸이 축 늘어지며 손가락 사이로 갈 곳을 잃은 핏물이 철철 넘쳐 흘러내렸다. 손을 떼자 이제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린 히어로의 몸이 종잇장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 모습에 다른 히어로들의 눈에 절망이 일렁였다.
“히어로 데쿠가 사람을 죽였어!”
“뭐가 히어로야!”
“사, 살, 살려줘! 데쿠가 미쳤어!”
고통스러운 비명과 자욱한 연기, 그리고 피비린내음이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그 현장을 내려다보며 미도리야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목 뼈를 으스르는 감각, 그리고 손바닥 사이로 느껴졌던 뜨거우면서도 끈적거리던 피. 죄책감도 잠시 오히려 알 수 없는 해방감에 마음이 편해지고, 도리어 짜릿한 쾌감까지 느꼈다. 미도리야는 자신이 우는 건지, 웃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을 구하던 손은 이제 붉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죄송해요, 올마이트…. 모두를 구하는 것이 진정한 히어로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제 그런 히어로는 존재하지 않아요.
제가 동경하던 당신도, 캇쨩도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에…
“히어로는 더이상 필요 없어요….”
제 가슴 포켓의 꽂아 두었던 흰 국화 한 송이를 꺼내 처참하게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 위에 살며시 얹었다. 그가 국화를 남겨두고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부패한 히어로들은 이 세상에 필요 없다는 종언, 이것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지상 최고의 히어로 사라졌다.
그야말로 상실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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